
영화는 핑계다.
고등학교 시험 시간이었다. 교실 안은 연필 소리와 숨소리뿐이었다. 그때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거기서 낮고 끈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정훈희의 안개였다. 시험지를 내려다보다가 멈췄다. 그 목소리가 교실 안을 천천히 채웠다. 문제 번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왔다.
그것이 내가 안개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시험지 위에 내려앉은 목소리 — 안개가 처음 만들어진 시간
안개는 1967년에 나왔다. 작곡가 이봉조가 만들었다. 정훈희는 그때 열일곱이었다.
이봉조는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 손에서 나온 곡이었다. 그가 이 노래를 열일곱 살 여고생에게 맡겼다.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노래는 어둡고 끈적했다. 퇴폐적이라는 말이 붙을 만했다. 그런데 정훈희의 목소리가 그 어둠을 통과했다. 목소리가 무너지지 않고 흘렀다.
안개는 원래 영화 주제곡이었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작품 〈안개〉(1967)의 삽입곡으로 처음 쓰였다. 소설도 영화도 안개를 모호함의 은유로 썼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것. 가까운 듯 닿지 않는 거리.
정훈희의 목소리는 그 속성을 그대로 담았다. 맑지 않고, 탁하지도 않았다. 가볍게 섞인 비음이 안개처럼 공기 속에 스몄다. 2022년 제43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정훈희가 안개를 딱 한 소절 불렀다. 옆에 앉아 있던 아이유가 놀라 고개를 돌렸고, 탕웨이는 눈물을 쏟았다. 한 소절이었다.
목소리가 그런 일을 한다.
박찬욱은 2년을 기다렸다
출발은 유튜브 자동재생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유튜브를 듣다가 우연히 트윈폴리오(송창식, 윤형주)가 안개를 커버한 버전을 만났다. 거기서부터 영화 〈헤어질 결심〉의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그는 말했다. 정훈희는 박찬욱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였고, 안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가요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훈희는 처음에 거절했다. 재녹음 의뢰를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 박찬욱은 기다렸다. 2년을. 정훈희 아니면 영화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송창식을 섭외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성대 결절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복이 덜 됐다는 이유로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자 박찬욱과 정훈희가 함께 움직였다. 송창식이 경영하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였다. 약속도 없이 찾아갔다.
송창식이 주말 무대에 서고 있을 때 두 사람은 객석에서 신청곡 쪽지를 냈다. 쪽지에 쓴 곡은 안개였다. 송창식이 안개를 부르다가 2절 가사를 잊어버렸다. 그때 객석에서 정훈희가 가사를 크게 불러줬다. 송창식이 놀라며 말했다고 한다. "아니, 이건 정훈희 목소린데?"
그렇게 셋이 무대 뒤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정훈희의 설득 끝에 송창식이 녹음에 합류하기로 했다. 기타 연주는 함춘호가 맡았다.
노래가 먼저였다, 영화는 나중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말했다. 영화의 출발점은 안개의 마지막 소절이었다고. 안갯속에서 눈을 뜨고 눈물을 감추라는, 그 마지막 말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헤어질 결심〉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형사 해준(박해일)이 서래(탕웨이)를 감시하고 의심하면서도 그 눈이 달라지는 것을,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안개처럼 뿌옇게 두고 관객에게 맡긴다. 정훈희의 목소리도 그랬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감정이 있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정훈희와 송창식의 듀엣 버전이 흐른다. 두 사람이 이 영화를 위해 새로 녹음한 버전이다. 정훈희가 단독으로 부를 때와는 결이 달랐다. 짙은 안개와 잠시 흐림의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는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개봉 이후 정훈희의 안개 스트리밍은 개봉 전 대비 2,351% 증가했다. 57년 된 노래가 2022년에 처음 들려온 것처럼 재생됐다.
안개는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낀다.
"영화는 핑계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노래는 창문 하나만 열려도 교실 전체를 채운다는 것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정훈희의 안개는 언제 발표된 곡인가요?
A. 1967년에 발표된 곡입니다. 작곡가 이봉조가 만들었으며, 당시 열일곱 살이던 정훈희의 데뷔곡입니다.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1967)의 삽입곡으로 처음 쓰였습니다.
Q. 헤어질 결심 엔딩곡은 정훈희 원곡인가요?
A.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곡은 원곡이 아닙니다. 박찬욱 감독의 요청으로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새로 녹음한 듀엣 버전입니다. 기타 연주는 함춘호가 맡았습니다.
Q. 박찬욱 감독과 정훈희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A. 박찬욱 감독은 유튜브 자동재생 중 트윈폴리오의 안개 커버를 우연히 듣게 됐고, 거기서 영화의 아이디어가 출발했다고 밝혔습니다. 정훈희는 처음 재녹음 의뢰를 거절했고, 박찬욱 감독이 2년을 기다린 끝에 성사됐습니다.
참고 출처
- 〈헤어질 결심〉(2022), 감독 박찬욱, CJ ENM
- 정훈희 — 안개 (1967), 작곡 이봉조
- 오마이스타, 「헤어질 결심 OST에 담긴 박찬욱의 메시지」(2022)
- 뮤직 앤 뉴 보도자료, 안개 스트리밍 집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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