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헨리 맨시니가 작곡한 영화 해바라기(원제 I Girasoli)의 러브 테마는 이듬해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소련 현지 촬영을 이유로 국내에서 12년간 상영이 금지됐고, 1982년 11월 14일에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곡은 익숙한데 정작 영화는 볼 수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오늘 다방 신청곡판 한 귀퉁이에서 꺼내본다.
해바라기밭과 낡은 축음기, 1970년의 선율을 떠올리며.
맨시니가 이 멜로디를 고른 이유
카를로 폰티와 비토리오 데 시카는 많은 것에서 부딪혔다. 촬영지도, 편집 방향도, 두 사람의 의견은 자주 갈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음악을 누구에게 맡길지에는 이견이 없었다. 둘 다 헨리 맨시니를 원했다.
맨시니는 이야기를 몇 개의 라이트모티프(등장인물이나 사건마다 반복되는 짧은 음악적 표지)로 짰다. 조반나의 테마는 다정한 선율로 시작한다. 마샤의 테마는 같은 사랑을 다루면서도 더 애가 탄다. 그리고 탐색 테마가 있다. 발라라이카(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의 삼각형 몸통을 가진 현악기) 소리를 앞세운, 슬픈 왈츠다. 조반나가 눈 덮인 벌판을 헤맬 때, 이 왈츠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늦춘다.
곡명도 몰랐다. 어느 겨울, 다방 구석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그 선율을 신청곡판에 적힌 글씨를 보고서야 알았다. '해바라기'라는 제목이었다. 영화는 아직 이 땅에 들어오기 한참 전이었다.
위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으면 아래 버튼으로 들을 수 있다.
Spotify에서 듣기 — Love Theme from Sunflower
음원 출처: Spotify 공식 플레이어 — Henry Mancini, 'Love Theme from Sunflower' (Sunflower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2024 리마스터)
해바라기밭, 흐르던 탐색 테마
조반나는 러시아의 광활한 들판에서 처음으로 그 해바라기밭을 맞닥뜨린다. 안내인이 통역해 준 설명은 담담하다. 이탈리아 병사도, 러시아 병사도, 독일 병사도, 그리고 민간인까지 이 자리에 묻혔다는 것. 꽃 한 송이가 죽은 사람 한 명을 대신한다는 것.
이 장면에서 탐색 테마가 다시 흐른다. 발라라이카가 현악 위에 얹히고, 리듬은 3박자로 흔들린다. 악보만 놓고 보면 그저 애조 띤 왈츠다. 그런데 화면 위에 얹히는 순간, 이 선율은 대사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한다. 한마디 설명 없이도, 관객은 조반나가 지금 무엇을 알게 됐는지 짐작한다.
마포구 봉래극장에서 동시상영으로 영화를 배운 눈에는, 이런 침묵의 활용이 낯설었다. 그 시절 본 활극들은 음악이 쉴 새 없이 깔렸다. 여백을 음악에게 통째로 내주는 방식은,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가사 붙은 버전들과 다른 결
밥 메릴이 이 주제곡에 가사를 붙였다. 제목은 '로스 오브 러브(Loss of Love, 잃어버린 사랑)'. 스콧 워커, 조니 매티스, 페출라 클락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렀다. 훗날 맨시니의 딸 모니카 맨시니도 다시 불렀다.
| 버전 | 형태 | 특징 |
|---|---|---|
| 오리지널 필름 버전 | 관현악 | 대사 없이 감정만 전달, 결론을 내리지 않는 편성 |
| Loss of Love (밥 메릴 작사) | 보컬 | '잃었다'는 단어로 의미를 못박음 |
| 커버 녹음(스콧 워커, 조니 매티스, 페출라 클락 등) | 보컬 | 가수별 창법으로 곡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짐 |
해바라기(1970) 주제곡의 주요 버전 비교
라디오 심야방송에서 들었던 버전은 현이 훨씬 얇았다. 필름 버전의 두꺼운 관현악과는 다른 곡처럼 들렸다. 같은 제목인데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50년 넘게 다시 불리는 이유
1971년, 이 곡은 제43회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다. 그해 수상은 프랜시스 레이의 '러브 스토리'에게 돌아갔다. 맨시니는 트로피를 놓쳤다. 그러나 곡은 트로피 없이도 남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선율은 영화 없이도 혼자 설 수 있다. '핑크 팬더', '문 리버'를 쓴 사람의 곡답게, 줄거리를 몰라도 멜로디만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국내에서는 영화가 1982년에야 단성사에서 개봉했지만, 이후로도 EBS 금요극장 같은 편성을 통해 여러 차례 다시 방영됐다. 곡은 영화보다 먼저, 그리고 더 오래 이 땅을 돌아다녔다.
요즘도 스트리밍에서 이 곡을 검색하면 몇 초 만에 재생된다. 다방도, 신청곡판도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전주가 시작되면, 그 겨울 다방 스피커 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해바라기밭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지는, 가본 적이 없어 모른다.
해바라기밭 앞, 세 줄
음악은 검열이 막지 못한 유일한 통로였다
• 영화는 12년간 상영이 막혔지만, 선율은 다방과 라디오를 타고 먼저 스며들었다.
곡은 1970년에, 영화는 1982년에 이 땅에 닿았다
•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시차로 만나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이 앗아간 것은 병사만이 아니었다
• 되찾지 못한 사랑 옆에는, 전쟁이 아이들에게서 앗아간 것을 담은 영화도 있다.
참고한 기록들
- Wikipedia — "Sunflower (1970 film)" 및 "List of awards and nominations received by Henry Mancini"
- IMDb — "Sunflower (1970)" 작품 정보 (감독·출연진·수상 내역)
- KMDb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전단 "해바라기(Sunflower, I Girasoli)", 발행일 1982-11-14
핑계왕초
전쟁으로 갈라진 부부와, 그 시절 다방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곡들을 눈여겨봅니다. 본 글의 자료는 2026.09.02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음악이 궁금하다면
해바라기가 다루는 것이 '되찾지 못한 사랑'이라면, 전쟁이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그린 영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