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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비하인드

시 2010, 지운 음악의 자리

by 핑계왕초 2026. 7. 15.

이창동 감독의 시(2010)는 배경음악을 전부 없앤 영화다. 빗소리와 골목의 소음, 66세 양미자(윤정희)의 발소리가 그 자리를 채우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네스의 노래가 침묵을 대신한다. 제63회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가 왜 음악 없이도 음악적인지 살펴본다.

배경음악을 지운 자리를 소음이 채웠다

빗소리, 골목의 마찰음, 강물 위 바람이 인위적인 음악을 대신해 관객을 현실 안에 밀어 넣는다.

침묵이 처음엔 빈자리였다가 소리가 됐다

음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의 허전함이, 장면이 쌓일수록 오히려 선명한 감각으로 바뀐다.

아네스의 노래가 침묵의 유일한 음악이 됐다

이창동 감독이 직접 쓴 이 시를, 싱어송라이터 박기영이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로 옮겼다.

참고한 기록들

  • 위키백과, 「시 (영화)」
  • 위키백과, 「윤정희 (1944년)」
  • 한국일보, 「음악 포기하려 했을 때 만난 이창동, 박기영의 결정적 순간」(2019.10.24)

강변에 홀로 선 미자, 침묵으로 그린 마지막 풍경

강변에 홀로 선 미자, 침묵으로 그린 마지막 풍경 (Google Gemini AI 생성 이미지)

목차
  1. 침묵이 음악이 된 영화, 이창동이 배경음악을 지운 이유
  2. 윤정희의 침묵, 배우의 공백이 음악의 공백과 겹치는 자리
  3. 아네스의 노래가 남긴 흔적, 박기영의 헌정부터 별세까지

침묵이 음악이 된 영화, 이창동이 배경음악을 지운 이유

이창동 감독은 시를 완성한 직후 모든 배경음악을 삭제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관객이 영화 속 상황과 감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인위적인 음악이 있으면 관객은 음악이 지시하는 감정을 따라간다. 슬픈 음악이 흐르면 슬프게, 긴장된 음악이 흐르면 긴장하게. 이창동은 그 유도를 거부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현실의 소리들이다. 양미자가 시 창작 교실을 오가는 골목의 소음, 한강 지류 강변의 바람 소리, 병원 복도의 발소리. 이 소리들은 영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공간에 있던 소리들이다. 음악이 없기 때문에 이 소리들이 오히려 영화의 일부가 된다.

음악이 있었다면, 강변에 앉은 미자의 침묵은 슬픈 선율 아래 설명되고 끝났을 것이다. 음악을 지움으로써 감독은 관객에게 감정을 지시하는 대신 스스로 느끼도록 자리를 비워뒀다. 처음 봤을 때는 뭔가 비어있다는 느낌이었다. 다시 볼 때는 그 빈자리가 오히려 가장 채워진 순간으로 다가온다.

윤정희의 침묵, 배우의 공백이 음악의 공백과 겹치는 자리

양미자는 손자가 또래 여학생의 죽음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를 써야 한다는 사명감을 놓지 못하는 66세 여성이다. 이 인물이 짊어진 것은 죄의 방관과 언어를 향한 갈망, 두 가지가 동시에 누르는 무게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 무게를 설명하는 음악이 단 한 소절도 없다.

음악이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다른 영화였다면, 미자가 침묵하는 장면마다 관객은 슬픈 선율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창동은 그 신호를 지웠다. 대신 배우의 얼굴과 호흡, 걸음의 속도가 음악이 하던 일을 떠맡는다. 대사보다 침묵이 길고, 그 침묵의 길이 자체가 이 영화의 유일한 박자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 장면이 유독 안타까웠다. 시는 고통의 심연에서 걷어올리는 고래 한 마리 같은 것이어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시는 생명을 잃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자가 손자의 죄를 외면하지 않고 시를 향해 나아가는 그 걸음이, 그래서 더 아프게 읽혔다.

윤정희는 1960년대부터 한국 영화계의 대표 배우였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프랑스 생활과 함께 활동이 뜸해졌다가 이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그 실제 공백이 스크린 위에서 미자의 침묵과 겹쳐 보인다. 음악이 없는 자리를 배우의 오랜 부재가 채우는 셈이다. 다른 배우가 이 역을 맡았다면 침묵은 연기의 선택으로 보였겠지만, 윤정희의 얼굴에서는 그것이 연기인지 실제 세월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시는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고, 2019년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기 전까지 한국 영화가 받은 칸 영화제 주요 부문 마지막 수상 기록으로 꼽힌다.

아네스의 노래가 남긴 흔적, 박기영의 헌정부터 별세까지

영화의 마지막, 양미자가 낭독하는 아네스의 노래는 이창동 감독이 직접 쓴 시다. 이창동은 이 시에 대해 미자가 죽은 소녀 희진의 마음을 대신해서 쓴 시라고 밝혔다. 강에 몸을 던진 소녀가 이 세상에 남기지 못한 말을, 미자가 시의 언어로 대신 전하는 구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추모가 아니냐는 질문에 이창동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도, 특정인의 죽음으로 한정하는 것은 영화의 의미를 좁히는 일이라고 답했다.

2010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무대에 시가 여러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정작 영화에는 쓸 OST가 없었다. 그 사정으로 섭외된 싱어송라이터 박기영은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을 받았고, 영화를 본 뒤 3주 만에 곡 작업을 마쳤다. 시의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하지 않고 전부를 가사로 옮겼다. 노래를 위한 가사가 아니라, 시를 위한 노래였다.

2023년 윤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다시 찾았다. 미자의 마지막 낭독이 윤정희의 마지막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퇴직 후 지난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다 이 영화를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화면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음악 없이 만들어진 이 영화는 배우가 떠난 뒤에도 그 침묵 속에서 계속 말을 건다.

음원 출처: Spotify 공식 플레이어 (박기영, 「아네스의 노래 (From. 영화 '시')」, 2010)

핑계왕초

음악이 없는 자리에 남는 것들을 붙잡아 옮겨 적습니다. 본 글의 자료는 2026.7.15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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