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스탠리 큐브릭은 알렉스 노스가 2주 만에 써낸 오리지널 스코어를 조용히 버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가 그 자리를 채웠다. 큐브릭은 노스에게 그 결정을 알리지 않았고, 노스는 뉴욕 시사회장에서야 사실을 알았다.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모노리스를 그린 이미지
알렉스 노스, 2주 만에 완성한 악보
MGM 스튜디오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오리지널 스코어를 원했다. 큐브릭이 <스파르타쿠스>(1960)에서 이미 한 번 함께 작업한 알렉스 노스가 낙점됐다. 노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클레오파트라>, <버지니아 울프가 두렵지 않아요?>의 음악을 만든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였다. 훗날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은 이름이다.
그는 2주 만에 40분짜리 스코어를 완성했다. 마감을 맞추느라 허리 경련이 왔고, 구급차를 타고 녹음 세션에 참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만큼 밀어붙여서 만든 음악이었다.
그런데 큐브릭은 편집 과정에서 임시로 깔아두었던 클래식이 오리지널 스코어보다 더 잘 맞는다는 걸 알아버렸다. MGM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을 밀었다. 결정을 노스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텔레비전 심야 방영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시작되는 장면이 나올 거라 막연히 기다리다가, 오프닝에 낯선 클래식이 흘러나와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 음악이 화면 속 침묵보다 더 오래 귀에 남았다.
큐브릭이 선택한 음악들
큐브릭이 골라 쓴 클래식은 네 작곡가의 곡이었다. 각각 정확히 특정 장면에 꽂혔다.
| 곡명 | 작곡가 (연도) | 삽입 장면 |
|---|---|---|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896) | 오프닝 · 도구 발견 장면 |
|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66) | 우주선 도킹 장면 |
| 가야네 아다지오 | 아람 하차투리안 (1942) | 디스커버리호 내부 장면 |
| 아트모스페어 外 | 죄르지 리게티 (1961~) | 모노리스 등장 장면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사용된 클래식 음악
노트북으로 다시 돌려보면서 우주선 도킹 장면에서 멈춘 적이 있다. 왈츠 박자에 맞춰 우주선이 천천히 회전하는 장면이었다. 소리를 끄고 재생해보니 우주선이 그냥 장치가 됐다. 왈츠가 흐를 때는 뭔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큐브릭이 말한 '움직임의 시(poetry of motion)'가 무슨 뜻인지 그때 처음 이해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896년에 쓴 교향시다. 니체의 동명 철학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큐브릭이 도입부 악장 '일출'(Sunrise)을 오프닝에 쓴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인류의 진화, 초인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가 영화의 서사와 맞닿아 있었다. 연주는 빈 필하모닉, 지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큐브릭은 미셸 시망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영화음악 작곡가라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브람스만 못하다. 이미 이토록 풍성한 고전 음악이 있는데 왜 그보다 못한 음악을 써야 하는가." 직접적인 말이었고, 노스의 이름은 없었다.
이 곡은 영화의 성공과 함께 클래식 음악 전반의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도 마찬가지였다. 1968년 이후 클래식 음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소양강변을 걷다가 이어폰으로 이 곡을 한 번 틀어본 적이 있었다. 물이 잔잔한 날이었는데, 첫 번째 팡파르가 터지는 순간 걸음이 멈췄다. 강이 갑자기 커 보였다. 큐브릭이 이 음악으로 오프닝을 시작한 이유를 그날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했다.
버려진 악보, 1993년에 돌아오다
알렉스 노스는 뉴욕 시사회장에서 자신의 음악이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충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스코어가 더 나았다고 생각했다.
노스의 음악이 처음 공개된 건 1993년이었다. 에리히 쿤젤과 신시내티 팝스 오케스트라가 텔라크 레이블로 일부 곡을 수록했다. 이후 지휘자 제리 골드스미스와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전곡을 녹음해 <Alex North's 2001>이라는 타이틀로 냈다. 두 개의 <2001>이 생겨난 셈이다.
제4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시각효과상을 받았다. 음악상 노미네이션은 없었다. 큐브릭이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닌 클래식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음악상은 오리지널 스코어에만 주어진다.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노스 버전을 우연히 발견해 들어봤다. 괜찮은 영화음악이었다. 그 음악으로 모노리스 장면을 머릿속에 얹어보니 장면이 달라졌다. 알렉스 노스의 선율은 영화를 1968년 안에 두었다. 큐브릭의 클래식은 영화를 시간 밖으로 꺼냈다. 그 차이가 전부였다.
영화의 오프닝, 어두운 화면 위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팡파르가 터지는 그 장면은 지금도 이 곡 하나로 압축된다. 검은 화면 위 저음의 파이프오르간이 서서히 차오르다가, 트럼펫 팡파르가 터지는 순간 태양과 지구, 달이 일직선으로 늘어선다. 대사도 자막도 없이 3분 가까이 이 장면만 이어진다.
위 플레이어가 재생되지 않으면 아래 버튼으로 들을 수 있다.
Spotify에서 듣기 — Also sprach Zarathustra (Main Title)
음원 출처: Spotify — Richard Strauss, Herbert von Karajan, Wiener Philharmoniker, 'Main Title: Also sprach Zarathustra, Op. 30' (2001: A Space Odyssey, 1996)
버려진 악보, 세 줄로
큐브릭은 완성된 오리지널 악보를 편집 중에 버렸다
감독의 거부가 음악의 방향을 바꿨다.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라 수백 년 된 클래식이 우주를 채웠고, 영화는 특정 시대 밖으로 나갔다.
자라투스트라와 왈츠가 영화를 시간 밖으로 꺼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팡파르는 인류 진화의 순간을 표시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는 우주선 도킹을 춤으로 만들었다. 노스의 스코어였다면 영화는 1968년 안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스의 음악은 1993년이 돼서야 세상에 나왔다
25년을 기다려 공개된 노스의 스코어는 <Alex North's 2001>이라는 앨범으로 나왔다. 지금도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하고, 어느 쪽이 더 나은가를 두고 이견이 갈린다.
참고한 기록들
- Wikipedia — 2001: A Space Odyssey (soundtrack) / 2001: A Space Odyssey (score)
- ASCAP Playback — "Alex North's Lost Score for Kubrick's 2001" (2012)
- IMDb — 2001: A Space Odyssey (1968) Full Cast & Crew · Soundtrack
핑계왕초
영화음악과 OST에 새겨진 시간을 기록합니다. 클래식 영화와 영화음악 비하인드에 오래 관심을 두어온 은퇴자입니다. 본 글의 자료는 2026.7.29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거부가 궁금하다면
음악을 거부하다 되돌린 감독은 큐브릭만이 아니었다. 타이타닉의 카메론도 같은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