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희의 데뷔곡 '안개'는 몇 번의 연습 끝에 완성됐을까. 1967년 영화 <안개> 주제가를 부른 열일곱 살 소녀는 리허설 두 번, 녹음 두 번 만에 이 곡을 끝냈다. 작곡은 색소포니스트 이봉조였고, 55년 뒤 이 노래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엔딩 크레디트에서 다시 울렸다.
안갯속에 남은 세 줄
연습 두 번, 녹음 두 번으로 끝났다
정훈희는 데뷔 무대도 없이 이 노래로 데뷔했다. 색소포니스트 이봉조가 멜로디를 건넸고, 며칠 뒤 녹음실에서 곧바로 두 번 불렀다.
40만 장이 팔린 뒤에도 낯선 이름이 붙었다
음반이 40만 장 넘게 팔렸지만, 정작 작사가 이름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저작권법조차 없던 시절의 일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다시 살아났다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엔딩에서 정훈희·송창식의 재녹음 버전이 흘렀다. 그 재녹음이 성사되기까지의 전말은 따로 정리해 둔 글에서 다룬다.
참고한 기록들
- 위키백과, "안개 (1967년 영화)" — 제작진·작사 논란 정리
- Wikipedia, "Mist (1967 film)" (영문판) — 크레딧·수상 기록
-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안개>(김수용, 1967) — 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 기록

안개(1967), 가상의 도시 무진의 포구를 재구성한 이미지
열여섯 소녀가 노래해야 했던 이유
종로 음반 가게에서 이 판을 처음 들었던 밤이 있었다. 재킷에는 앳된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 목소리가 영화 속 여선생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안개>의 음악 감독은 색소포니스트 이봉조였다. 이 선율은 사실 처음부터 노래로 태어나지 않았다. 1960년대 초 봉봉사중창단의 코러스와 이봉조의 색소폰 연주로 먼저 발표된 경음악[가사 없는 연주곡]이었다.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로 옮기면서, 그 선율에 가사를 입혀 주제가로 만들었다.
보컬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온 10대 소녀 정훈희가 작은아버지의 반주로 노래하는 걸 이봉조가 우연히 들었다. 판 한 장을 건네며 멜로디를 외워 오라고 했다. 며칠 뒤 녹음실, 리허설 두 번에 녹음 두 번. 그렇게 데뷔곡이 완성됐다.
무진의 포구에서 울린 그 노래
젊을 땐 그저 옛날 가요로 들었다. 나이 들어 다시 보면 다르다. 안개 낀 포구 장면에 이 곡이 깔릴 때마다, 인물들의 거짓말이 들리는 것 같다.
영화 속 무진은 실재하지 않는 도시다. 서울에서 성공한 윤기준(신성일)이 고향에 내려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과 짧은 관계를 맺는다. 하인숙이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이다. 화면 속 얼굴은 윤정희지만, 그 목소리는 정훈희의 것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흔했던 방식이다.
기타·색소폰·하모니카로 변주되는 이 테마는 대사 없는 장면마다 되돌아온다. 안개라는 자연 현상이, 인물들의 흐릿한 진심을 대신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작사가는 따로 있었다
오랫동안 음반과 악보에는 작사가 이름이 박현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키백과 기록은 다른 이름을 가리킨다. 원작자이자 각색자인 소설가 김승옥이 실제 작사가라는 것이다.
당시엔 저작권법이 정비되지 않았고, 이름을 남기는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화사가 나중에 작사가 이름을 누구로 할지 물었을 때도, 김승옥은 "알아서 하라"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 다른 이름이 크레딧에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나도 재킷에 적힌 그 이름을 그냥 믿었다. 크레딧 한 줄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영화 전체의 음악감독 크레딧도 마찬가지로 엇갈린다. 영문 기록에는 정윤주라는 이름이 오르지만, 정작 주제가 '안개'를 작곡한 사람은 이봉조로 거듭 확인된다. 크레딧 한 줄과 실제로 곡을 쓴 사람이 늘 같지는 않다.
55년 만에 다시 울린 목소리
1970년 도쿄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는 이 곡으로 가수상을 받았다.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이 노래를 다시 불러냈다.
영화 중반에는 1967년 정훈희의 원곡이 그대로 흐른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새로 녹음한 듀엣 버전이 자리한다. 그 재녹음이 어떻게 성사됐는지는 따로 자세히 적어둔 글이 있다.
원곡과 헤어질 결심 듀엣 버전을 나란히 다시 들어봤다. 정훈희의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옆에 얹힌 송창식의 음성이 그 사이의 시간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음원 출처: Spotify 공식 플레이어 — 정훈희(Jung Hoon Hee), '안개' (Truth, Women in the Rain, Mist 컴필레이션 수록)
열일곱 살에 두 번 부르고 끝난 노래가, 55년 뒤 다시 그녀를 스튜디오로 불렀다. 안개는 걷히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핑계왕초
영화음악과 OST에 새겨진 시간을 기록합니다. 흑백영화 시절의 가요를 특히 즐겨 듣습니다. 본 글의 자료는 2026.8.8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음악이 궁금하다면
55년 만의 재녹음이 어떻게 성사됐는지는 이 노래만의 우연이 아니었다. 2년의 기다림과 미사리 카페에서의 즉흥 설득까지, 그 전말을 따로 정리해 두었다.